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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992년, 고려의 성종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가하였는데, 당시 부용창(芙蓉倉)이라는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이 건치되었다.
    당시 한강 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두었는데, 부용창은 곡창 지대인 전라지방의 6개 조창 중 하나였다.
    당시 법성은 진개부곡(陳介部曲)이라 하여 지금의 용성리에 있었고, 조창도 대덕산 뒷자락 지금의 고법성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면서 왜국의 약탈이 극심해졌고,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법성포 전경

    새로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잠재우고 조운(漕運)을 재개하였다. 이때 조창은 대폭 개편되었으니 전국에 9개, 전라에 3개로 축소됨에 따라 수세지역(收稅地域)은 증대되었다. 당시 영광을 위시하여 옥과, 담양, 장성, 정읍, 곡성, 순창, 고창, 창평, 흥덕, 부안, 함평, 진안, 무장, 고부 등 15개 군현을 맡았다. 이 때에 조창의 소재지가 법성포로 이전되었다.

    120년이 지난 중종 7년에는 나주에 있던 영산창이 제반사정으로 인해 폐창되면서 법성창에 병합이 되었다. 이로써 법성창은 무려 28개 지역을 관할하는 국내 최대의 거창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는데, 최초에는 만호진(萬戶鎭)이라는 소규모의 수군을 주둔시키는 데 그쳤다. 점차 그 규모가 커져 116년 후인 인조 8년(1630년)에는 첨사진(僉使鎭)으로 하였다가 정조 13년(1789년)에는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었다.

    수군첨절제사(수군첨절제사)는 품계로는 종3품에 지나지 않지만, 독진이 된 후로는 진량면의 행정일반까지를 영광군수의 관할 밖에서 집행하게 되었으니, 거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백년 동안 존재해온 법성포의 조창도 시대적 변천과 국가적 비운으로 인하여 서서히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져 갔는데,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하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전초전을 펴던 1800년대 말까지도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성포 마을의 역사는 조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창이 있었기에 수군이 있었다.
    다시 말해, 법성포의 역사는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경제적ㆍ군사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법성포 천년의 역사를 찾을 수 있겠다.